한때 난 냉소의 극을 달렸었다.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내가 그곳에 갔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내가 본 그곳에는 냉소밖에 없었다. 냉소의 끝에는 허무함조차도 없다.
냉소라는 건 매우 편리하다. 그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마찰은 서로의 가치나 의견의 대립으로 발생한다. 즉, 그 본질을 파고들면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가치관을 관철" 혹은 "설명" 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 문제는 서로 다른 가치관에 정답은 없으며, 관철이 아닌 목적이라도 그것을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혹은 왜곡된다던가.
아무튼 인간이 많기에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일반적으로 여기에서 몇 가지 대처방법이 나온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이겨보려 애를 쓰지만, 서로의 앞에 서로가 없기 때문에 분명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더 열받는다. 만약 당신이 내 앞에 있다면, 치고 받고 싸우면 될 것을 끝도 없이 키보드만 두드려야 되는 거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라, 만약 내가 졸라게 두드린 것을 녀석이 건성으로 읽거나, 읽지조차 않거나, 왜곡해 버린다면 거기에서 미치는 거다.
어떤 이는 피하려 한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그 과정에서 다른 답을 찾는다. 마치 훈수를 두듯이. 내가 그 싸움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내 눈에는 맞는 말을 하는 놈들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 기준에서 맞는 것일 뿐. 결국 모두는 맞는 소리를 하고 있다. 모두가 정답이라면, 죄다 부질 없는 거다. 그러다가, 자신은 그 어떤 생각도 없어져 버리는 상태가 온다.
싸움이 났다. 원래가 싸움구경은 최고의 재미 아닌가? 그렇게 구경을 하다가 툭 하고 던지는 거다. 본래 훈수 두는 사람은 당사자들보다 잘 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미끼에 물린 것들을 상대한다. 난 애초에 여기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미 즐긴다. 내 미끼를 문 녀석들은 부지런히 날 어떻게 해보려 하지만, 내게는 우길 것도, 받아들일 것도 없다. 이길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이기는 것도 아니다. 결론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난 그 어떤 이득도, 피해도 없다.
"아내의 유혹" 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입양한 아이를 파양하려는 부모가 등장한다. 아이가 어릴땐 큰 딸 대신이라며 그렇게 이뻐하더니, 그 아이 덕에 피 섞인 딸이 죽자 파양하려 한다.
안젤리나 졸리는 충분히 그 많은 아이들을 키울 여유가 있을 거다.
하지만 한편으로 난 생각한다. 냉소의 극을 달려봤었기 때문에, 그 끝에 있는 생각까지는 쉽게 도달한다.
안젤리나 졸리는... 단순히 아이가 좋은 것은 아닐까?
그녀가 키우는 아이들은 어쩌면... 애완견 대신은 아닐까?
물론 존나 엿 같은 생각이란 건 알고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 아이가 귀여운 시절을 함께한다는 것이 아니다. 함께 웃고, 슬퍼하고, 야단치고 지지고 볶고 난리 부르스를 모두 함께 한다는 거다. 아이는 개와 다르다. 개는 죽을때까지도 여전히 주인의 보살핌을 받는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 자식은, 언젠가 부모와 동일한 인격체가 된다. 그리고 그 인격체가 호랑말코가 될지, 보살이 될지는 부모에게 달렸다고 말할 수 밖에.
"쟤는 참 아이들을 좋아해."
라는 말에는, "쟤는 다 큰 애는 안좋아해" 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냉소의 끝에서 난, 이 앨범을 추천한다.
Pink Floyd / Darkside of the Moon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내가 그곳에 갔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내가 본 그곳에는 냉소밖에 없었다. 냉소의 끝에는 허무함조차도 없다.
냉소라는 건 매우 편리하다. 그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마찰은 서로의 가치나 의견의 대립으로 발생한다. 즉, 그 본질을 파고들면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가치관을 관철" 혹은 "설명" 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 문제는 서로 다른 가치관에 정답은 없으며, 관철이 아닌 목적이라도 그것을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혹은 왜곡된다던가.
아무튼 인간이 많기에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일반적으로 여기에서 몇 가지 대처방법이 나온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이겨보려 애를 쓰지만, 서로의 앞에 서로가 없기 때문에 분명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더 열받는다. 만약 당신이 내 앞에 있다면, 치고 받고 싸우면 될 것을 끝도 없이 키보드만 두드려야 되는 거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라, 만약 내가 졸라게 두드린 것을 녀석이 건성으로 읽거나, 읽지조차 않거나, 왜곡해 버린다면 거기에서 미치는 거다.
어떤 이는 피하려 한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그 과정에서 다른 답을 찾는다. 마치 훈수를 두듯이. 내가 그 싸움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내 눈에는 맞는 말을 하는 놈들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 기준에서 맞는 것일 뿐. 결국 모두는 맞는 소리를 하고 있다. 모두가 정답이라면, 죄다 부질 없는 거다. 그러다가, 자신은 그 어떤 생각도 없어져 버리는 상태가 온다.
싸움이 났다. 원래가 싸움구경은 최고의 재미 아닌가? 그렇게 구경을 하다가 툭 하고 던지는 거다. 본래 훈수 두는 사람은 당사자들보다 잘 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미끼에 물린 것들을 상대한다. 난 애초에 여기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미 즐긴다. 내 미끼를 문 녀석들은 부지런히 날 어떻게 해보려 하지만, 내게는 우길 것도, 받아들일 것도 없다. 이길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이기는 것도 아니다. 결론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난 그 어떤 이득도, 피해도 없다.
"아내의 유혹" 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입양한 아이를 파양하려는 부모가 등장한다. 아이가 어릴땐 큰 딸 대신이라며 그렇게 이뻐하더니, 그 아이 덕에 피 섞인 딸이 죽자 파양하려 한다.
안젤리나 졸리는 충분히 그 많은 아이들을 키울 여유가 있을 거다.
하지만 한편으로 난 생각한다. 냉소의 극을 달려봤었기 때문에, 그 끝에 있는 생각까지는 쉽게 도달한다.
안젤리나 졸리는... 단순히 아이가 좋은 것은 아닐까?
그녀가 키우는 아이들은 어쩌면... 애완견 대신은 아닐까?
물론 존나 엿 같은 생각이란 건 알고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 아이가 귀여운 시절을 함께한다는 것이 아니다. 함께 웃고, 슬퍼하고, 야단치고 지지고 볶고 난리 부르스를 모두 함께 한다는 거다. 아이는 개와 다르다. 개는 죽을때까지도 여전히 주인의 보살핌을 받는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 자식은, 언젠가 부모와 동일한 인격체가 된다. 그리고 그 인격체가 호랑말코가 될지, 보살이 될지는 부모에게 달렸다고 말할 수 밖에.
"쟤는 참 아이들을 좋아해."
라는 말에는, "쟤는 다 큰 애는 안좋아해" 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냉소의 끝에서 난, 이 앨범을 추천한다.
Pink Floyd / Darkside of the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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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가 쓴 글이, 내가 모르는 곳에,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인용되고 싸질러지는 것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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