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뎁이 열연한 "스위니 토드".
스위니 토드에게 반한 러벳부인은, 조안나의 생사를 묻는 토드의 말에 트릭을 건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토드는 '당연히' 조안나의 안부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러벳부인은 다만 50%의 대답을 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토드는 당연히 조안나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훌륭한 방법인가.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서 다른 이에게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다. 무속인의 기본이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생활하면서 끝도 없이 마주한다. 우리는 은연중에 거짓말이 '나쁜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가능하다면 하지 않으려 애쓴다. 의무교육의 성과요 바른생활-도덕-윤리로 이어지는 교과서 인생의 승리다.
6월 17일,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안철수씨에 대한 네티즌의 반응. 이렇게까지 긍정적인 반응은 역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만약 박지성이 무릎팍 도사에 나온다고 한들 이 정도의 반응이 나올까. 이것은 반응의 크기가 아니라 그 반응의 성향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이 정도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시청자에게 줄 수 있었는가.
영화나 만화에서 '스테레오 타입' 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다른 인간과 생활함에 있어서 무의식중에 다른 인간을 관찰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인간을 만나고, 또 얼마나 많은 상황에 놓이게 되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그 속에서 우리는 '반응'을 배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닥친 상황,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아무튼 [내가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될 것인가] 정도일까. 인간으로 치자면, 그 인간의 외모/말투/행동/지인 뭐 이런 기타 등등등을 종합해서 이 인간에 대한 판단을 은연중에 하고 있다는 거다.
무릎팍 도사에 나온 안철수의 모습은, 그것을 분석하기 보다는 결과를 두고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는 편이 유익하다. '이러이러한 모습이 아마도 순수하게 비춰졌을 것이다' 라던가, '이런 말투, 행동이 진심으로 보였다' 따위의 '대충 이정도 각도?' 식의 분석은 의미가 없다. 무릎팍에서 보여준 안철수의 모습은, [적어도 절대다수의 인간이 보기에 존나 선량하고 성실하고 긍정적인 포스를 가득 뿜는 무지개 빛 아우라를 등진 모습] 이라는 결론이 가장 타당하다.
난 매번 삐딱하지는 않다. 뭐, 의도적으로 삐딱하게 가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 역시 핑계를 대자면 '예상대로 되기 싫어서' 이다. 예측할 수 있는 범위의 인간이 되면, 먼 훗날 발생할 어떤 행동에 대한 막대한 피해와 책임이 수반되게 된다. 뭐 이런 거시적이고 소심한 관점이 아니더라도, 난 네놈의 예상범위 안에 있기가 싫다는 거다. 난 내 맘대로 하니까.
"제가 참으면서 산 기억이 없더라고요."
"사람이 1, 2년은 참지만 20년을 어떻게 참아요"
"돈<명예<맘 편한 것"
내가 본 안철수라는 사람은 뭐랄까... 자신이 말한 것이 전부인 것 같았다. 뭐 방송에 나온 것을 갖고 이리저리 판단한다는 것이 개소리인 것 같긴 하지만, 이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마음편하게 살고 있는 것 같긴 했고, 또 그것을 100%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
내 맘대로 살고 싶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된다. 왜 이렇게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 역시 내 마음대로 살고있고 궁극적으로 그 삶을 지탱하는 힘은 자신에 대한 과도한 믿음과 자신감 정도다. 오줌을 싸건 피똥을 싸건 엎드려서 똥을 핥건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일단 넘길 수만 있다면 녀석을 반드시 요절낸다 정도의 느낌이랄까.
안철수씨가 나보다 몇 십년을 더 살긴 했지만, 어차피 궁극적으로는 같다고 본다. 당장 내일 하루를 넘길 수 있는 정도의 의지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가 보면 세월은 흘러가니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완성될 뿐이다. [어릴때는 이러지 않았잖아] 라는 건 [그 땐 미완성이었어] 일 뿐, 결국 아무리 파고 또 파도 그걸 파서 나오는 건 내 살덩어리란 말이다. 뭐, 마누라를 잘 만나거나 죽다 살아나거나 해서 뭔가가 달라보이긴 하겠다. 그러나, 그게 정말로 변한 것일까. 정말로 변할수도 있겠지만 안철수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미숫가루 마냥, 그냥 섞여있는 거다. 표현식이 바뀌었을 뿐. 언제나 일관된 선택을 하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지랄맞은 선택이지만, 결국 지향점은 [내가 좋은 걸로 하자] 라는 거다.
강호동이 질문한다.
"지금도 현재 일반인에게는 무료로?"
자, 승부다.
어떤 상황에 대해 인지함에 있어서 사람은 여러가지의 수단을 동원한다. 오감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람과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한다는 거다. 왜냐하면 이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싶기 때문에. 지금도 영화 '친구'의 네티즌 리뷰를 보면 준석이가 동수를 죽이라고 했니 안했니 싸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본능에서 나온다. 그 끝이 진실이건 뭣이건, 인간은 스스로 타당하다고 만족하거나, 절대다수가 그렇다고 할만한 뭔가를 찾으려 한다.
안철수는 주춤했다. 이 의미는 크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나보다 몇 십년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해도 준비되지 않은 질문에는 찰나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제까지의 질문에서와는 전혀 다른 시간과, 행동과 시선을 보여주기 때문에.
내가 항상 까고있는 '웅크린 감자' 라는 다음 블로거는, 기본적으로 우뚝 선 자신의 가치관이 없는 인간이다. 이 인간과 몇 몇 블로그에 대해 조만간 포스팅을 할 생각인데, 아무튼 문제가 뭐냐 하면 이 색히들은 줏대가 없다는 거다. 심지라고 해야할까? 뭔가 존재감 있는 인간들의 말을 들어보거나 그들이 싸지른 글을 읽어보면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이 보인다. 심지어 '이 놈은 제멋대로군' 정도의 느낌도, 제멋대로 기둥 정도로 느껴진다는 거다. 헌데 이 놈은 여기선 이랬다가 저기선 저랬다가, A를 두고 여기선 좋다고 하다가 저기선 그럭저럭이랬다가 요컨대 지가 한 말에 책임을 못진다는 거다.
내가 쓴 글을 보면 항상 등장하는 주제나 내용이 있다. 이게 바로 최근의 내 관심사가 되고, 최근의 나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원동력이 되고, 최근 느끼거나 생각하는 모든 주제는 이쪽과 관련된 필터를 거친 글이 싸질러지는 거다.
안철수는 강호동의 질문 이전의 대담에서 줄곧 자신의 바이러스 사업에 대해 '금전과 동떨어진', '보다 많은 컴퓨러 사용자를 위한' 정도의 말을 하고 있었다. 만약 여기에서 네거티브한 대답을 해버리면 자신이 했던 말을 정면으로 뒤엎는 것이 된다. 심지어 '아니, 중간에 잠깐 유료였다' 정도가 되더라도 이제까지 이끌어온 자신에 대한 인식과 앞으로 자신이 할 선택에 대한 정당성 등이 모두 훼손되게 된다. 결국 정답은 '네, 무료입니다' 라는 간단한 한마디다.
안철수는 사족을 붙인다. 사족의 원인이 정말로 이래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강호동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네] 혹은 [무료입니다] 정도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제품명까지 말해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나는 조안나가 죽었다고는 하지 않았어.]
러벳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안철수도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그는 순수하다. 정말로 순수하다.
난 진심으로 순수한 사람이 무섭다. 난 적어도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뭔가 할 때에 일말의 망설임이 존재한다.
페르시아 왕자 기억하냐? 그리 오래된 게임이 아니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이 횡스크롤 게임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은 아래로 추락해서 침에 찔려 죽는 거다. 헌데, 재미있는 장치가 하나 있었다. 페르시아 왕자가 멀리뛰기로 뛰어넘을 수 있는 거리를 3 이라고 한다면, 4 정도의 공간이 있는 거다. 그 아래는 날카로운 침밭이고, 떨어지면 찔려 죽는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넘어야 할까? 4라는 공간 중 1 정도는 허공에 떠 있는 타일이 덮고 있다. 이 타일은 밟은 뒤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무너진다. 요컨대 딱 한 번 밟을 수 있다는 거다.
난 순수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 타일을 밟았다가도 되돌아 온다. 하지만 그 찰나의 망설임에 타일은 무너지고, 난 그 4칸짜리 공간을 넘어갈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거다.
안철수는 순수하다. 그렇기 때문에 난 그가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두렵다.
그는 다만 내키는 대로 사는 방식 중, 운좋게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살아온 것이니까.
스위니 토드에게 반한 러벳부인은, 조안나의 생사를 묻는 토드의 말에 트릭을 건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토드는 '당연히' 조안나의 안부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러벳부인은 다만 50%의 대답을 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토드는 당연히 조안나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훌륭한 방법인가.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서 다른 이에게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다. 무속인의 기본이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생활하면서 끝도 없이 마주한다. 우리는 은연중에 거짓말이 '나쁜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가능하다면 하지 않으려 애쓴다. 의무교육의 성과요 바른생활-도덕-윤리로 이어지는 교과서 인생의 승리다.
6월 17일,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안철수씨에 대한 네티즌의 반응. 이렇게까지 긍정적인 반응은 역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만약 박지성이 무릎팍 도사에 나온다고 한들 이 정도의 반응이 나올까. 이것은 반응의 크기가 아니라 그 반응의 성향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이 정도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시청자에게 줄 수 있었는가.
영화나 만화에서 '스테레오 타입' 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다른 인간과 생활함에 있어서 무의식중에 다른 인간을 관찰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인간을 만나고, 또 얼마나 많은 상황에 놓이게 되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그 속에서 우리는 '반응'을 배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닥친 상황,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아무튼 [내가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될 것인가] 정도일까. 인간으로 치자면, 그 인간의 외모/말투/행동/지인 뭐 이런 기타 등등등을 종합해서 이 인간에 대한 판단을 은연중에 하고 있다는 거다.
무릎팍 도사에 나온 안철수의 모습은, 그것을 분석하기 보다는 결과를 두고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는 편이 유익하다. '이러이러한 모습이 아마도 순수하게 비춰졌을 것이다' 라던가, '이런 말투, 행동이 진심으로 보였다' 따위의 '대충 이정도 각도?' 식의 분석은 의미가 없다. 무릎팍에서 보여준 안철수의 모습은, [적어도 절대다수의 인간이 보기에 존나 선량하고 성실하고 긍정적인 포스를 가득 뿜는 무지개 빛 아우라를 등진 모습] 이라는 결론이 가장 타당하다.
난 매번 삐딱하지는 않다. 뭐, 의도적으로 삐딱하게 가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 역시 핑계를 대자면 '예상대로 되기 싫어서' 이다. 예측할 수 있는 범위의 인간이 되면, 먼 훗날 발생할 어떤 행동에 대한 막대한 피해와 책임이 수반되게 된다. 뭐 이런 거시적이고 소심한 관점이 아니더라도, 난 네놈의 예상범위 안에 있기가 싫다는 거다. 난 내 맘대로 하니까.
"제가 참으면서 산 기억이 없더라고요."
"사람이 1, 2년은 참지만 20년을 어떻게 참아요"
"돈<명예<맘 편한 것"
내가 본 안철수라는 사람은 뭐랄까... 자신이 말한 것이 전부인 것 같았다. 뭐 방송에 나온 것을 갖고 이리저리 판단한다는 것이 개소리인 것 같긴 하지만, 이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마음편하게 살고 있는 것 같긴 했고, 또 그것을 100%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
내 맘대로 살고 싶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된다. 왜 이렇게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 역시 내 마음대로 살고있고 궁극적으로 그 삶을 지탱하는 힘은 자신에 대한 과도한 믿음과 자신감 정도다. 오줌을 싸건 피똥을 싸건 엎드려서 똥을 핥건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일단 넘길 수만 있다면 녀석을 반드시 요절낸다 정도의 느낌이랄까.
안철수씨가 나보다 몇 십년을 더 살긴 했지만, 어차피 궁극적으로는 같다고 본다. 당장 내일 하루를 넘길 수 있는 정도의 의지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가 보면 세월은 흘러가니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완성될 뿐이다. [어릴때는 이러지 않았잖아] 라는 건 [그 땐 미완성이었어] 일 뿐, 결국 아무리 파고 또 파도 그걸 파서 나오는 건 내 살덩어리란 말이다. 뭐, 마누라를 잘 만나거나 죽다 살아나거나 해서 뭔가가 달라보이긴 하겠다. 그러나, 그게 정말로 변한 것일까. 정말로 변할수도 있겠지만 안철수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미숫가루 마냥, 그냥 섞여있는 거다. 표현식이 바뀌었을 뿐. 언제나 일관된 선택을 하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지랄맞은 선택이지만, 결국 지향점은 [내가 좋은 걸로 하자] 라는 거다.
강호동이 질문한다.
"지금도 현재 일반인에게는 무료로?"
자, 승부다.
어떤 상황에 대해 인지함에 있어서 사람은 여러가지의 수단을 동원한다. 오감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람과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한다는 거다. 왜냐하면 이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싶기 때문에. 지금도 영화 '친구'의 네티즌 리뷰를 보면 준석이가 동수를 죽이라고 했니 안했니 싸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본능에서 나온다. 그 끝이 진실이건 뭣이건, 인간은 스스로 타당하다고 만족하거나, 절대다수가 그렇다고 할만한 뭔가를 찾으려 한다.
안철수는 주춤했다. 이 의미는 크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나보다 몇 십년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해도 준비되지 않은 질문에는 찰나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제까지의 질문에서와는 전혀 다른 시간과, 행동과 시선을 보여주기 때문에.
내가 항상 까고있는 '웅크린 감자' 라는 다음 블로거는, 기본적으로 우뚝 선 자신의 가치관이 없는 인간이다. 이 인간과 몇 몇 블로그에 대해 조만간 포스팅을 할 생각인데, 아무튼 문제가 뭐냐 하면 이 색히들은 줏대가 없다는 거다. 심지라고 해야할까? 뭔가 존재감 있는 인간들의 말을 들어보거나 그들이 싸지른 글을 읽어보면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이 보인다. 심지어 '이 놈은 제멋대로군' 정도의 느낌도, 제멋대로 기둥 정도로 느껴진다는 거다. 헌데 이 놈은 여기선 이랬다가 저기선 저랬다가, A를 두고 여기선 좋다고 하다가 저기선 그럭저럭이랬다가 요컨대 지가 한 말에 책임을 못진다는 거다.
내가 쓴 글을 보면 항상 등장하는 주제나 내용이 있다. 이게 바로 최근의 내 관심사가 되고, 최근의 나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원동력이 되고, 최근 느끼거나 생각하는 모든 주제는 이쪽과 관련된 필터를 거친 글이 싸질러지는 거다.
안철수는 강호동의 질문 이전의 대담에서 줄곧 자신의 바이러스 사업에 대해 '금전과 동떨어진', '보다 많은 컴퓨러 사용자를 위한' 정도의 말을 하고 있었다. 만약 여기에서 네거티브한 대답을 해버리면 자신이 했던 말을 정면으로 뒤엎는 것이 된다. 심지어 '아니, 중간에 잠깐 유료였다' 정도가 되더라도 이제까지 이끌어온 자신에 대한 인식과 앞으로 자신이 할 선택에 대한 정당성 등이 모두 훼손되게 된다. 결국 정답은 '네, 무료입니다' 라는 간단한 한마디다.
안철수는 사족을 붙인다. 사족의 원인이 정말로 이래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강호동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네] 혹은 [무료입니다] 정도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제품명까지 말해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V3
[나는 조안나가 죽었다고는 하지 않았어.]
러벳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안철수도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그는 순수하다. 정말로 순수하다.
난 진심으로 순수한 사람이 무섭다. 난 적어도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뭔가 할 때에 일말의 망설임이 존재한다.
페르시아 왕자 기억하냐? 그리 오래된 게임이 아니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이 횡스크롤 게임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은 아래로 추락해서 침에 찔려 죽는 거다. 헌데, 재미있는 장치가 하나 있었다. 페르시아 왕자가 멀리뛰기로 뛰어넘을 수 있는 거리를 3 이라고 한다면, 4 정도의 공간이 있는 거다. 그 아래는 날카로운 침밭이고, 떨어지면 찔려 죽는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넘어야 할까? 4라는 공간 중 1 정도는 허공에 떠 있는 타일이 덮고 있다. 이 타일은 밟은 뒤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무너진다. 요컨대 딱 한 번 밟을 수 있다는 거다.
난 순수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 타일을 밟았다가도 되돌아 온다. 하지만 그 찰나의 망설임에 타일은 무너지고, 난 그 4칸짜리 공간을 넘어갈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거다.
안철수는 순수하다. 그렇기 때문에 난 그가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두렵다.
그는 다만 내키는 대로 사는 방식 중, 운좋게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살아온 것이니까.
위 글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게재할 경우, 반드시 해당 사이트와 주소를 댓글에 남겨주기 바란다.
난 내가 쓴 글이, 내가 모르는 곳에,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인용되고 싸질러지는 것이 싫다.
난 내가 쓴 글이, 내가 모르는 곳에,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인용되고 싸질러지는 것이 싫다.



